나의고향/奉化鄭氏

[스크랩] 스크랩] 정도전,조선500년 법치 기틀 다져

우서~바 2009. 2. 8. 19:45

 

정도전,조선500년 법치 기틀 다져
로크보다 300년 앞서 사회계약설 설파...민본 애민사상 바탕…재상중심정치 주장

삼봉 정치·사회사상의 핵심은 "군주보다는 국가가, 국가보다는 백성이 윗자리에 있기 때문에 백성은 국가의 근본인 동시에 군주의 하늘이므로 군주는 백성을 위하고[위민(爲民)], 백성을 사랑하고[애민(愛民)], 백성을 존중하고[중민(重民)], 백성을 보호하고[보민(保民)], 백성을 기르고[목민(牧民) 또는 양민(養民)], 백성을 편안하게[안민(安民)]해야 한다."는 '민본사상(民本思想)'이었다.

먼저 삼봉이 창전한『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의「부전(賦典)」「부세(賦稅)」항목에는 "통치자는 법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서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평화롭게 해주어야만 민생이 편안해진다. 그러나 그 일은 농사를 지으면서 병행할 수 없기에 백성은 1/10을 세로 바쳐 통치자를 봉양하는 것이다. 통치자가 백성으로부터 수취하는 것이 큰 만큼 자기를 봉양해주는 백성에 대한 보답 역시 중한 것이다. 후세 사람은 부세법을 만든 의의가 이러한 것을 모르고 '백성들이 나를 공양하는 것은 직분상 당연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가렴주구를 자행하면서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걱정하는데, 백성들이 또한 이를 본받아서 서로 일어나 다투고 싸우니 화란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 내용은 벼슬아치들이 법이라는 공평한 잣대로 백성들 사이에 평화와 안정을 주기 때문에 백성들이 세금을 내는 것이라는 일종의 '사회계약사상'을 이야기한 것으로서, '자연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약을 맺고 정부를 세운다.'는 계몽사상가 존 로크(John Locke : 1632~1704)의 사회계약설보다 무려 3백 년이나 앞선 시기에 이미 사회계약설의 핵심을 설파하였다.

또한 당시의 시대적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왕제도를 받아들여 새로운 왕조를 열었지만, 삼봉이 생각한 정치의 본질은 윤리적 규범을 전제로 하고 근본적으로 백성들의 안정을 도모하는 재상 중심의 '왕도정치'였다. 이는 군왕이 전권을 행사하지 않고 재상이 중심이 되어 국가의 각 조직이 자기 역할을 해나가는 정치제도로서 지금의 내각책임제와 비슷한 제도였다. 어떻게 보면 근대적 의미의 민주주의 제도와 상당히 유사한 재상중심주의에 대해 "왕조국가에서 가장 합리적인 정치제도"라고 주장한 삼봉은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대간(臺諫)의 견제 기능을 강화하고 국가의 근본을 바로 세우기 위한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는 등 국가의 기본 체계를 잡기 위한 노력을 밤낮으로 기울였다.

하지만 삼봉의 이런 입장은 왕권중심주의를 신봉하던 태종 이방원 뿐만 아니라 조선의 역대 군주들에게는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기에 개혁군주인 영·정조(英·正祖)를 제외하고는 조선왕조 내내 만고역적의 족쇄에서 풀려나지 못하다가 사후 467년 만인 고종 2년(1865)에야 비로소 흥선대원군에 의해 경복궁 설계의 공을 인정받아 복권됐던 것이다.

광해군 때 조선 명문가로 꼽힌 양천 허씨 가문의 적자로서『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지은 교산 허균이 특출한 재능으로 벼슬길에 올랐으면서도 서얼 출신들과 함께 새로운 나라를 세워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반역을 꾀하다가 역모죄로 체포됐을 때, "역적 허균은 한평생 정도전을 흠모하여 항상 현인(賢人)이라고 칭찬했으며「동인시문(同人詩文)」을 뽑을 때도 정도전의 시를 가장 먼저 썼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듯이 그가 삼봉의 시를 좋아한 것조차 역모의 증거로 제시될 정도였다.

한편, 맹자(孟子)에 의하면 통치권은 '하늘의 명령', 즉 '천명(天命) = 천공(天工) = 천리(天理)'에 의하여 부여되고 합리화되는 것으로서, 천명이 떠나면 통치권은 소멸되고 덕이 있는 다른 자에게 천명이 옮아가서 그가 새로운 통치자로서의 통치권을 부여받게 되는데, 이처럼 부덕한 통치자에서 유덕한 통치자로 천명이 바뀌는 것을 곧 혁명이라 하며, 천명이 성이 다른 자에게 돌아갈 때 이를 역성혁명(易姓革命)이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맹자의 논리에 따르자면 통치자가 민본·애민의 도덕규범을 저버리고 이에 위배되는 악정을 베푼다면 언제든지 역성혁명은 가능하다는 것인데, 삼봉은 맹자의 이 역성혁명론과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주장하는 유가의 도덕주의 및 사회참여론을 바탕으로 조선건국의 논리로 삼았을뿐더러, 성리학을 조선의 정치이념으로 만들기 위해 애썼던 것이다.

여기서 삼봉의 민본사상의 진수라 할 수 있는 전제개혁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삼봉이 자기 스승이었던 이색 및 같은 문하생이면서 한때는 뜻을 같이했던 정몽주 등과 갈라섰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최대의 정적 관계가 된 근본적 이유도 바로 이 전제개혁에 대한 입장 차이 때문이었다.

고려 말 권문세족들이 차지하고 있던 사유지가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고리대로 자영농민들의 토지를 빼앗는 일은 예사고, 심지어는 무력을 사용해 약탈하거나 강점하는 등 상상할 수 있는 온갖 탈법적인 방법을 동원함으로써 산천으로 그 경계를 삼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자영농민들이 몰락하는 상황에서 이색·정몽주·이숭인·길재 등의 온건파는 자기네 기득권을 잃지 않기 위해 '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 : 땅의 소유자인 지주와 소유자를 대신하여 농사를 짓는 소작농 제도)'를 옹호했다. 반면에 조선왕조 개국에 적극 참여한 급진파는 대부분이 신흥사대부들로 권문세족의 물질적 기반인 사전을 혁파함으로써, 그들의 정치적 실권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부자는 땅이 더욱 불어나고 가난한 자는 송곳을 꽂을 땅도 없다"는 명분을 내걸고 '경자유전(耕者有田 : 농사를 짓는 농민이 땅을 소유함)'을 주장하면서 '계민수전(計民授田 : 또는 '계구수전(計口授田)'이라고도 하는데, '전국의 토지를 국가에 귀속시켜 나라 안의 모든 농민들에게 식구 수대로 토지를 분배하는 방식'임)' 방식의 가장 철저한 전제 개혁을 지향했던 것이다.

삼봉이 전제개혁을 추진한 배경과 관련해 일부에서는 삼봉의 모계가 천인 출신이라는 약점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하지만, 이는 삼봉을 두 번 죽이는 짓일 뿐이다. 삼봉은 전라도 나주 부근의 회진현 거평부곡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체험한 비참한 농촌 현실과 삼봉이 초옥을 짓기 전에 임시로 기거하던 집의 주인인 농부 황연(黃延)의 위로에 깊은 충격을 받은 경험담들을「소재동기(消災洞記)」에서 그대로 밝혔듯이, 사대부와 일반 백성이 함께 잘 살 수 있는 사회개혁을 추진하겠다는 결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요동정벌을 위한 준비가 최고조에 이르고 사병이 혁파되면서 이에 협조를 거부하던 반대세력이 궁지에 몰려 있을 즈음, 다섯째 왕자 이방원은 삼봉으로 인해 왕실 세력이 위축되고 중신 중심의 집권 체제가 강화되는 상황에 불안을 느끼고는 난을 일으킬 준비를 시작한다.

그리고 태조가 궁중에서 심한 해소병을 앓고 있는 틈을 타 셋째 형 익안군 방의(益安君 芳毅)와 넷째 형 회안군 방간(懷安君 芳幹)을 불러들이고 처남이던 민무구(閔無咎)·무질(無疾) 형제와 하수인 지안산군사(知安山郡事) 이숙번을 동원해 1398년 8월 26일 새벽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는 당시 조정의 중심 세력이 모여 있던 송현동 남은의 첩 집을 급습하여 삼봉과 남은·부성군 심효생(富城君 沈孝生) 등을 살해한다.

삼봉의 최후와 관련하여『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삼봉이 이웃 민부(閔富) 집으로 피신했다가 그의 고발로 이방원 앞에 끌려나오자, "옛날에 그대가 나를 살려주었는데, 이번에도 살려달라."고 애걸하였다며 비겁한 모습으로 묘사했지만, 참수당하기 직전에 삼봉이 읊었다는「자조(自嘲)」라는 다음의 시에는 오히려 그의 혁명가다운 기개가 오롯이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繰存省察兩加功 내 몸을 바로잡고 세상을 살피는데 공력을 다해 살면서

(조존성찰양가공)

不負聖賢黃卷中 책 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저버린 적이 없었노라

(부부성현황권중)

三十年來勤苦業 삼십 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온 업적이

(삼십년래근고업)

松亭一醉竟成空 송현방 정자 한 잔 술에 헛되이 사라졌네.

(송정일취경성공)



'조선왕조의 설계자' 삼봉은 요동정벌이라는 태조 이성계와 자신의 마지막 야망을 펴보지도 못한 채 허망한 최후를 맞고 말았지만, 삼봉을 비명에 가게 한 태종조차 개혁의 기본 방향만큼은 삼봉의 주장을 그대로 따랐고, 그리하여 조선왕조는 세계 왕조 사상 그 유례를 찾기 힘든 500년 역사를 이어갔던 것이다.

세조 11년 영의정 보한재 신숙주(保閑齋 申叔舟)는 삼봉의 증손자였던 야수 정문형(野? 鄭文炯)의 부탁으로『삼봉집(三峰集)』의 후서를 써주면서, 삼봉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격찬했다고 한다.



개국 초에 무릇 나라의 큰 규모는 모두 선생이 만들었으며, 당시 영웅호걸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으나 그분과 비교할 만한 이가 없었다.

박성일 저술가ㆍ문화해설가ㆍblog.naver.com/geochips

<사진설명=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은산2리에 위치하고 있는 삼봉 정도전 사당(위)과 조선 전기의 학자이자 문신이며, 조선개국의 으뜸공신인 삼봉 정도전(1337∼1398)의 시문과 글을 모은 삼봉집 의 목판(아래).>

 

 

조선 기틀만든 '삼봉 정도전' 충북이 낳은 '세기의 혁명가'

 충북이 낳은 위인 가운데 우리 역사는 물론이고 세계사를 통틀어 유일무이한 인물이 있으니, 500년이나 지속된 국가운영시스템을 거의 혼자 힘으로 완벽하게 만들어냄으로써 '조선의 설계자'로 평가받는 삼봉 전도전(三峰 鄭道傳 : 1342~1398)이다. 그리하여『1인자를 만든 참모들』이란 정치서적을 쓴 정치평론가 이철희는 한민족 역사에서 필적할 만한 이가 없는 '한국사 최강의 개혁 경세가'로 평가했듯이, 삼봉은 웅대한 구상을 가진 경세가만이 할 수 있는 시대 기획·국가 설계를 통해 조선을 건국한 것만은 누구도 부인 못할 분명한 사실이다.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 선생이 자신의 호를 삼봉이라 할 만큼 젊은시절 이곳에서 청유하였다고 전해지는 도담삼봉.


하지만 500년 조선역사는 물론이고 근세까지도 삼봉에 대한 평가는 이 명백한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은 채 '고려 말·조선 초의 학자·정치가이자 혁명가'라는 무미건조한 내용, 또는 국사 교과서에서조차도 '경망한 인물이니 분란을 일으키는 인물'로 묘사하는 등 부정적 평가가 주를 이루었다.

다행히도 20세기에 들어와 재야사학자 이이화(李離和)는『인물한국사』에서 "흔히 반란을 벌이거나 역적 노릇한 사람쯤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아우로부터 왕의 자리를 빼앗은 이방원이 그 장애인물인 정도전을 제거하고 나서 그에게 온갖 혐의를 씌웠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그는 역신(逆臣)으로 몰려 죽었기에 시호도 내려지지 않았고, 한 사람의 일생을 적어 알리는 행장이나 신도비나 묘비의 글조차 없었다."고 지적하고는 "적어도 고려 말의 정치적·경제적 모순을 바로잡고 사회적 혼돈을 수습하고 나선 혁명가요, 실질적인 통치이념을 정립한 실천적 지식인"이라고 평가하면서, "이런 점을 간과해버리고 한 왕을 높이기 위해 이루어진 곡필만을 믿어서야 죽은 자가 너무 억울하지 않겠는가?"란 문제 제기로 삼봉을 변호했는데, 최근 들어 삼봉을 새롭게 평가하려는 움직임이 활기를 띠고 있어 천만다행이다.

그러면 조선 역사에서 삼봉에 대한 평가가 왜 부정적이었는지, 그리고 현대의 평가는 어떠한지 등을 살펴보면서 삼봉의 인물 탐구를 시작하기로 하자.

태조 3년(1395)에 삼봉이 정당문학(正堂文學) 부재 정총(復齋 鄭摠)과 함께『고려사(高麗史)』를 지어 바치자, 태조 이성계는 "경의 학문은 경서와 역사의 깊은 문제까지 파고 들어갔고, 지식은 고금의 변천을 꿰뚫고 있으며, 공정한 의견은 모두 성인들의 말에서 출발하고, 명확한 평가는 언제나 충실한 것과 간사한 것을 갈라놓았다. 나를 도와 새 왕조를 세우는데 공로가 있을 뿐 아니라, 좋은 계책은 정사에 도움이 될 만하고 뛰어난 글재주는 문학 관계의 일을 맡길 만하다. 거기다가 온순한 선비의 기상과 늠름한 재상의 풍채를 갖고 있다. 내가 왕위에 오른 첫날부터 경이 유용한 학식을 갖고 있어 재상으로 임명하고 또한 역사를 맡은 관직까지 겸임하게 하였더니 재상의 직책을 다하면서도 책을 만드는 데서까지 업적을 나타내었다."며 치하했다고 한다. 또한 태조는 술이 거나하게 취할 때마다 "삼봉이 아니면 내가 어찌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그를 존경하고 존경하는 바이다. 으뜸가는 공신이었다."라며 극찬했다고 한다.

하지만 삼봉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내가 정도전을 벌주려는 것은 천하만세의 계책을 위함이다. 태조가 그렇게 강하고 현명한 임금이었는데도 정도전과 같은 신하가 나왔다. 하물며 후세에 만일 용렬한 임금, 약한 임금이 있으면 신하가 정도전을 본받아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고 하여 아버지와는 정반대의 평가를 내린다.

여기서부터 삼봉에 대한 평가는 왜곡되기 시작하는데, 이는 태종의 말에서도 드러났듯 태종 이하 역대 왕들은 삼봉 같은 걸출한 신하의 출현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봉은 조선역사에서 의도적으로 망각된 인물로 치부된 것이다.

▲평택 소재 정도전기념관.
삼봉의 이름을 고의로 지운 또 하나의 세력은 사림파(士林派)였다. 그 맥은 여말선초 개혁을 주창한 신흥사대부 중에서 삼봉에 패한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로부터 야은 길재(冶隱 吉再) → 강호 김숙자(江湖 金叔滋) → 점필재 김종직(?畢齋 金宗直) →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로 이어졌는데, 이들은 조선 건국 후 80~90년 동안 재야에서 절치부심하며 정몽주를 '조종(祖宗)'으로 하는 폐쇄적 '통 이론(統 理論)'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 삼봉은 당연히 입에 담아서는 안 될 터부였다. 특히 사림 역사에서 가장 강하게 '통(統)'과 '예(禮)'를 주장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삼봉을 지칭할 때마다 썼다는 '간신(姦臣)'이란 표현은 그들의 정서를 그대로 대변한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오직 권력을 탐한 이방원과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쿠데타를 일으켜 동생과 조카를 죽이고 태종과 세조(世祖)로 등극했지만, 이들의 행위는 오히려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꼴이 되었고, 그 후손들은 권신들에게 휘둘리게 되면서 그들이 그렇게도 지키고자 했던 왕권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거기다 더 가관인 것은 이방원의 참모로서 삼봉을 죽이고 왕권을 탈취한 무인정사(戊寅靖社)의 일등공신 호정 하륜(浩亭 河崙)이나 수양대군의 참모로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절재 김종서(節齋 金宗瑞)를 죽이고 단종(端宗)을 내쫓은 압구정 한명회(狎鷗亭 韓明澮)는 여전히 역사의 영웅으로 미화되고 있으며, 또한 삼봉의 모범적인 신권중심주의를 악용해 자기들의 권력 놀음으로 만들어 버리고는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당쟁이나 사화도 불사하는 등 삼봉의 신권중심주의의 최대 수혜자가 그들임에도 오히려 삼봉을 간신으로 폄훼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분위기에서도 삼봉을 제대로 평가하려는 작업은 간간이 이루어졌다. 태조가 삼봉을 일컬어 "유종(儒宗)"이라 칭한 이후, 삼봉의 배불운동을 보면서 당시 유학자들은 "유일한 동방의 진유(眞儒)"라 극찬했으며, 개혁을 꿈꾼『홍길동전(洪吉童傳)』의 저자 교산 허균(蛟山 許筠)은 삼봉을 평생 동안 흠모했다고 한다. 또한 개혁군주인 영조(英祖)와 정조(正祖)는 삼봉을 재평가했고, 조선조 마지막 개혁의 주인공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마침내 삼봉을 복권시켰던 것이다.

그러면 현대의 평가는 어떠할까?

1973년 한영우(韓永愚) 전 서울대교수의 기념비적인 저서『정도전 사상의 연구』를 계기로 철학·정치학 분야에서 삼봉 연구가 간헐적으로 이어지다가, 1998년 KBS-TV 대하사극『용의 눈물』에서 부각되면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이런 현상에 대해 한 교수는 "당대 호걸 중의 호걸로 정치·경제·국방·사상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변화와 혁명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그 위치가 남다르다."고 평가하면서 "삼봉학(三峰學)이 율곡학(栗谷學)·퇴계학(退溪學)·다산학(茶山學)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학자층이 형성되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이런 예측대로 2003년 '삼봉 정도전 선생 기념사업회' 주최의 '제1회 삼봉학 학술회의'가 드디어 개최되었다.

여기서 최상용(崔相龍) 고려대 정외과 명예교수는「정치가 정도전을 생각한다」란 논문을 통해 '정치가로서의 삼봉'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벌이면서 "삼봉은 플라톤(Platon)이 말하는 철학(Philosophia)·마키아벨리(Machiavelli)가 말하는 덕성(Virtue)·막스 베버(Max Weber)가 말하는 책임윤리(Verantwortungsethik)가 모두 겸비된 정치가로서 단테(Dante)나 마키아벨리를 뛰어넘는 인물"이라고 주장하였다.

도올 김용옥(金容沃) 또한『삼봉 정도전의 건국철학』에서 "정치가의 평가란 본시 피비린내 나는 정치권력의 장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성과를 냈느냐에 따라 이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학자나 예술가처럼 무조건 호의적인 평가만 얻을 수 없다."고 전제하고, "우리는 자신의 삶을 통하여 정치적 권력에 헌신하고, 그 권력을 공적인 가치로 전환시키는 위대한 정치적 지도자를 갈망한다. 이러한 갈망에 부합되는 인물로서 우리는 삼봉을 뛰어넘는 인물을 우리 역사에서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삼봉은 우리 조선의 역사에서 세계 정치사에 치립할 수 있는 인물로서 내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혁명아요, 프로페셔널 폴리티션일지도 모른다."는 최 교수의 평가에 동의하는 한편, "레닌(Lenin)이 마르크시즘에 대한 확고한 자기류의 해석을 완성함으로써 볼세비키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듯이, 삼봉은 주자학에 촉발받아 이념적인 혁명의 틀을 완성함으로써 조선왕조를 개창할 수 있었기에 성공한 정치가이자 사상가"라는 평가를 내렸다.

삼봉의 평가와 관련해 보다 현실정치적 측면에서 접근한 연구자도 있다. 이철희는『1인자를 만든 참모들』에서 참모의 등급을 크게 세 단계로 나누고는 먼저 가장 등급이 높은 '경세가'는 '세상과 시대를 경영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면서, 무릇 경세가는 최소 한 세대는 지속될 시스템이나 정책을 만들어낼 경륜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그 대표적 인물로 삼봉과 장량(張良)을 지명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등급인 '책사'는 '일을 도모하기 위해 책략을 짜내는 사람'으로 정의하면서 삼봉을 죽이는데 앞장선 하륜과 한명회를 대표 인물로 꼽았으며, 가장 하급 참모라 할 '모사꾼'은 '짧은 순간에 유용한 간계나 네거티브한 술수를 꾸미는 사람'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출처 :목련꽃이 질때 원문보기 글쓴이 : 어린왕자☆
출처 : 존재의 이유
글쓴이 : 드레곤플라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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