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삼봉 정도전에 대한 기존 사료가 허위 날조되었음을 고발하고 또 한영우의 분석이 잘못임을 지적하여, 진실을 천하에 밝히기 위하여 게제하는 것입니다.
1. 정도전의 어머니
공리와 원칙에 철저하여 강직한 훌륭한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정도전은 자신의 능력으로 벼슬길을 달려나갔지만, 그의 학문과 경세에 대한 이상과 위망이 높아갈 수록 시기와 경계의 수위는 그만큼 높았던 것이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의 신분을 흠집 내어 정치적으로 매몰시키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외가를 빙자하여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정도전의 출신을 공식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한 것은 공양왕대부터이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공양왕 3년 9월 성헌(省憲)의 관리들은 정도전을 탄핵하면서 "정도전의 가풍(家風)이 부정(不正)하고, 파계(派系)가 밝지 못하다"고 지적하고, 그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이듬해 4월에도 간관(諫官) 김진양·이확·이래·이감·권홍·유기 등이 연합 상소를 올려 정도전 등을 탄핵하면서 "정도전은 천지(賤地)에서 몸을 일으켜, 높은 벼슬에 올랐다"고 공격하였다. 이때 그들은 정도전뿐만 아니라, 조준·남은·윤소종·남재·조박 등 이성계 일파를 한꺼번에 공격했는데, 유독 정도전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험구하였다. 그만큼 당시 정도전의 역활과 비중이 크다는 것을 반증한다. 여기서 정도전의 가풍(家風)이나 파계(派系)가 천하고 분명하지 않다는 말은 한사람의 인격을 극도로 폄하 하는 것으로 시세말로 상스런 욕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정도전을 결함이 있는 인물로 여론을 몰아 제거하기 위한 속셈이 내포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조에서도 정도전을 살해하여 태조정권 몰락시키고 정권을 잡은 이방원은 정도전과 반대 입장에 있던 고려 구신세력을 거의 포용하였고, 하륜, 변계량 등에 명하여 태조실록을 편찬하게 하였다. 한편 이방원은 정도전에 관한 기사는 손수 철저히 검열하여 의식적으로 자신과 고려 구신들이 목적하는바 그들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혹독하게 결함 인물로 만들었다. 먼저 《태조실록》의 정도전졸기(卒記)를 보기로 한다.
정도전의 자(字)는 종지(宗之)요 호는 삼봉이다. ……그의 외조 우연(禹延)의 처 부 김전(金전)은 일찍이 중이 되었다. 김전은 수이(樹伊)라는 종의 아내를 간하여 딸 하나를 낳았는데, 이 여자가 도전의 외할머니이다. 현보(禹玄寶)의 자손은 김전과 인척으로서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정도전이 처음에 벼슬길에 오를 때 대간에서 고신(告身, 신분증)을 지연시키자, 정도전은 우현보의 자손이 소문을 퍼뜨려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원한을 품었다. 그러다가 뜻을 이루게 되자 현보 집안을 무함(誣陷)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우씨의 죄를 만들어 황거정(黃居正) 등으로 하여금 세 아들을 죽이게 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정도전의 외할아버지는 우연(禹延)이라는 사람이고, 외할머니는 김전(金전)이라는 승려가 자기 종의 아내와 관계를 맺어 낳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단양 출신의 유학자인 우현보의 세 아들이 세상에 퍼뜨리고 정도전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를 때 고신을 선뜻 내주지 않았으므로 정도전이 원한을 품고 있다가 개국 뒤에 우현보의 세 아들에게 보복을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현보의 세 아들은 홍수(洪壽)·홍득(洪得)·홍명(洪命)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들은 정도전이 벼슬길에 나아갈 당시에 나이가 어려 직접 정도전의 고신을 취급할 처지도 못되고 소문을 퍼뜨릴 정도로 지각이 성숙되지도 않았다.
정도전이 1360년 고시관 이교에 의하여 국자감시에 선발되었으며, 1362년 고시관 홍언박과 유숙에 의해 임인과에 급제 하였다. 이때 우현보의 아들 5형제 중 맏이 홍수가 1355년생으로 5~7세, 둘째 홍부가 홍수와 연년생(1356)이라 하드라도 4~6세, 셋째 홍강이 1357년생으로 3~5세, 넷쩨 홍득이 홍강과 두 살 터울로 보면 1359년생으로 1~3세, 막내 홍명이 1361년생으로 갓난 아이었다.
그리고 현보의 아들 중 가장 먼저 관리가 된 넷째 홍득이 1376년(우왕2) 17세로 홍중선이 지공거로 치른 병진방에서 급제하였다. 물론 홍득은 관리로 진출하여사헌부 집의를 거쳐 전교부령의 직에 있다가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된 후 강원도로 귀양 갔다가, 7월 조선이 개창된 뒤 현지에서 죽었다. 그리고 맏아들 홍수와 셋째 홍강이 1377에 급제하였고, 둘재 홍부가 1382년에 급제하였으며, 막내 홍명이 1383년 정몽주의 고시관에서 장원급제하였다.
이와 같이 이들이 급제 하여 관로에 진출할 즈음 삼봉은 이미 성균관제주 지제교라는 정4품 관직으로 있다가, 친원파 이인임의 미움을 받아 나주유배 중이거나 해배되어 종편허락으로 유랑생활 중에 있었다. 이러한 사실로 보면 삼봉이 과거에 급제할 당시에 현보의 아들들은 어린아이거나 갓난아이였다. 곧 하륜과 변계량이 쓴 실록 기사처럼 이들이 삼봉의 치부를 인식하고 소문을 퍼뜨리거나 경멸할 수 있는 지각이 형성되지 않았으며, 또한 고신에 서명할 처지도 못 된다는 것이 명백하다. 어린아이가 무엇을 어찌 알며 공문서를 취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도전이 처음 벼슬길에 오를 때 우현보의 아들들이 모두 그의 치부를 알고 소문을 퍼뜨리고 경멸(輕蔑)하였다거나, 매번 관직을 옮기고 임명될 때마다 그들이 대성(臺省)의 관리로서 고신(告身)에 서명하지 않아, 삼봉이 관로 진출에 어려움이 많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봉이 조선개국 후 이들에게 앙갚음을 하기 위하여 무함하고 죄를 만들어 황거정을 시켜 모두 죽였다,’ 라는 것도 사실이 아니었다. 우현보의 아들 중 죽은 사람은 우홍득, 우홍명과 손자 우성범등 단 세 사람이다. 홍득은 이른바 박자량 사건에 연루 되었고, 홍명은 尹彛·李初 사건 즉 이성계가 명을 침공한다는 밀고 사건과 김저의 사건 즉 우왕이 김저에게 당부하여 이성계를 살해하려던 사건에 연루되어 죽었다. 따라서 이들이 죽은 것은 명분과 이유가 분명하였다. 이와 같이 위 기록은 사실로서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보의 아들들이 대간들에게 소문을 퍼뜨릴 수 있는 나이에 있었다는 것은 허위이다. 다만 공양4년 이색,우현보,정몽주를 필두로 한 세력과 정쟁이 치열할 때라면 수긍이 가능하다. 이때 우현보의 아들이 관리의 고신 취급하는 대간의 직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태조실록》원년 8월 임신조에 거듭 정도전의 신분을 한층더 첨가 왜곡 폄하하여 기사화 하였다. 그 기록을 다음에 옮겨본다.
우현보의 족인(族人)에 김전(金전)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일찍이 중이 되었는데, 자기의 종[奴]인 수이의 아내와 몰래 정을 통하여 딸 하나를 낳았다. 김전의 족인들은 모두 수이의 딸이라고 말하였으나, 김전은 홀로 자기의 딸이라고 주장하면서 은밀히 그 딸을 사랑하였다. 뒤에 김전은 환속하여 수이를 내쫓고 수이의 처를 빼앗아 자기의 아내로 삼았다. 그리고 그 딸을 사인(士人) 우연(禹延)에게 시집보내고, 노비와 전택(田宅)을 모두 주었다. 우연은 딸 하나를 낳아서 공생(貢生) 정운경(鄭云敬)에게 시집보냈다. 운경은 벼슬을 하여 관직이 형부상서에까지 올랐으며, 아들 셋을 두었다. 정도전이 바로 그 맏아들이다. 정도전은 처음에 벼슬길에 오를 때 우현보의 아들들이 모두 정도전을 경멸하였고, 정도전의 벼슬이 승진할 때마다 대성(臺省, 사헌부)에서 고신에 서경(署經, 사인)을 하지 않았다. 정도전은 우현보의 자제들이 그렇게 하였다고 생각하고 분하고 원통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공양왕이 등극하여 우흥수의 아들 우성범이 왕의 사위가 되자 정도전은 우성범 등이 세를 타고 자신의 근원을 밝힐까 두려워 우현보 집안을 모함하는 일을 꾀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위에 인용한 《태조실록》의 두 기록은 믿을 만한 것인가. 앞에서 이미 언급한바 위의 실록기사는 정도전을 역적으로 몰아 죽인 태종시대에 편찬된 것이므로, 정도전을 매몰하기 위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태조실록은 태종 이방원이 일일이 열람하고 점검하였고, 사관들 역시 정도전을 증오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정설로 보기엔 흠결이 있다. 더욱이 세종의 강력한 요구로 무려 7차례의 개수와 수정을 거쳐 문종대에 편찬된 《고려사》는 대부분 정도전에 관한 기록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한 세종의 뜻에 따라 태조실록의 기사와 같은 내용을 실은 것이다.
한편 정도전 자신은 자기 외가의 신분을 어떻게 썼을까. 정도전이 쓴 아버지 정운경의 행장(行狀)에는 "부인 우씨(禹氏)는 ……영주의 사족(士族)인 산원(散員) 영천우씨(榮川禹氏) 우연(禹淵)의 딸이다"라고 하여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산원 우연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기록을 앞의 실록기사와 비교해 보면 정도전의 외할아버지의 한자 이름이 우연(禹淵)으로 되어 있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도전의 출생을 전해주는 기록에는 또 《차문절공유사》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세조1년 박팽년, 하위지 등이 고려유신 차원부(車原부)의 죽음에 얽힌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그 속에 차원부와 관련 없는 정도전의 족보를 기록한 것이 다. 이 기록에 따르면, 목천우씨(木川禹氏) 우연(禹淵)은 중랑장 차공윤(車公胤)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고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실록에는 단양우씨 우연(禹延)이 김전의 딸과 혼인한 것으로 되어 있고, 《차문절공유사》에는 목천우씨 우연(禹淵)이 차씨와 혼인한 것으로 되어 있어 내용이 서로 다르다. 발음이 같아 언뜻 우연이 두 아내를 가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한자의 글자가 다르고 각각 우연의 본관과 생존연대가 같지 않기 때문에 실록의 기사가 터무니없이 조작되었다는 것이 명백하다. 차원부는 조선개국을 반대한 인물인 까닭에 정도전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갖지 않았고, 따라서 박팽년, 하위지 등은 세종이 아끼던 신하였고, 이들은 선왕의 뜻을 반영 차문절공설원기에 정도전의 출생을 왜곡하여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한편 충청북도 단양지방에는 예로부터 정도전의 출생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그 내용은 정운경이 젊었을 때 어느 관상가(觀相家)를 만났는데, 관상가는 정운경이 10년 뒤에 결혼하면 재상이 될 아이를 얻을 수 있다고 예언하였다. 이 말을 믿은 정운경은 10년간 금강산에 들어가 수양하고 고향인 봉화로 돌아오던 길에 단양 삼봉에 이르러 어느 초가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정운경은 이곳에서 우씨 여자를 만나 정을 나누게 되었고, 그렇게 낳은 아이가 곧 정도전이라는 것이다. 그는 과연 관상가의 예언대로 훗날 재상이 되었다. 정도전의 호가 삼봉(三峯)이라는 것도 단양 삼봉을 가리키는 것이고, 도전(道傳)이라는 이름은 길에서 얻었다는 것이다.
단양지방에 내려오는 위 전설은 아마도 정도전에게 보복을 당한 단양우씨(丹陽禹氏) 집안이나 후세인들이 사실을 과장하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 이야기에는 진실과 거짓이 함께 섞여 있다. 정운경이 금강산을 갔다는 이야기는 사실에 맞는 것 같다. 그는 20대 때에 안동에서 공부하면서 관리로 재직하고 있는 가정 이곡(稼亭 李穀)과 절친하게 교류하여 하였다. 두 사람은 곧 의기투합하여 동방[관동지방]을 여행하였다. 이 사실이 정도전이 쓴 <정운경행장>에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 정도전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는 상당 부분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 준다. 20대 후반에 급제하여 정운경은 홍복도감이라는 중견 관리로 나이 38세에 맏아들 정도전을 얻었다. 이 사실은 10년 뒤에 결혼하면 재상이 될 아이를 얻는다는 관상가의 예언과 또한, 정도전의 어머니가 우씨라는 사실도 기록과 일치한다 하더라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아버지 정운경이 정도전을 낳을 때는 수행인이 따르는 사회적 신분으로 혼자 이동을 할 수 없고, 행동에 엄격한 제약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공리와 원칙에 입각한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임이 정도전이 쓴 행장과 고려사 양리전에 나와 있다. 이것은 위 전설 내용을 반증하고 있다. 전설속의 인물은 세간의 무직임한 속물이다. 당연히 비난받아 마땅한 저질적인 행위이다. 그러나 정운경의 대쪽같은 성격과 관리로서 직무수행 이력 등을 고려해 볼 때 진실성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또 정도전의 이름이나 호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 도전이라는 이름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도(道)를 전한다는 유교적인 뜻이 담긴 것이고, 삼봉(三峯)이라는 호는 정도전이 1370년 현실 정치에 회의를 가져, 그의 옛집 삼각산(三角山)으로 낙향 학문에 몰두하고 있을 때, 그를 아끼는 친구들이 학문과 경세에 최고봉이 되라는 뜻에서 지어준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자(字) 종지(宗之)는 으뜸이라는 뜻이다. 다시말하면 삼봉이라는 호와 괘를 같이 하여 학문과 경세에 으뜸이 되겠다는 의지가 표방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정도전의 출생을 장황하게 소개하는 것은 한 집안의 내력을 흥미 위주로 캐보려는 뜻이 있어서도 아니요, 정도전의 집안을 흠집 내기 위함도 아니다. 조성왕조의 개국을 전후한 시기 즉, 공양왕 4년(1390)부터 태조7년(1398)까지 신구 세력간의 갈등 속에서 정도전이라는 한 인물이 정치적으로 얼마나 비중이 높았던가를 이해하기 위함이다. 더욱이 정도전이 조선건국이라는 혁명의 불길을 지폈을때, 구가세력의 반발은 그 주동자를 제거하기 위한 방편으로, 또 왕위세습과 관련한 이방원의 불만은 결국 기습 살해라는 최후 수단을 동원한 것과 이후 철저하고도 냉혹하게 매몰하였음을 것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2004. 1. 24. 鄭 璟 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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