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고향/奉化鄭氏

[스크랩] [스크랩] 민본정치 불씨 당긴 나주 `삼봉 정도전`

우서~바 2009. 2. 8. 19:53

[스크랩] 민본정치 불씨 당긴 나주 `삼봉 정도전`

  • 글쓴이: 璟甫
  • 조회수 : 9
  • 09.01.21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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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란 백성을 위한 것'
주민 순박함ㆍ따뜻한 대접에 감탄, 민초細評 통해 바른정치 실현 의지
지금은 당시 흔적 없고 유적비만

 

삼봉의 유배지 소재동에는 <소재동삼봉선생유허비>와 <삼봉 정도전선생 유적비>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늘이 유난히 높고 햇빛은 눈부시게 환하다. 드넓게 펼쳐진 들판은 쏟아지는 햇빛을 곱게 부수더니 아른아른 고운 아지랑이로 피워올리고, 저기 먼 곳에서 하늘과 맞닿았다. 나주 유배길에 오르던 삼봉(三峰) 정도전(1342~1398)은 손차양을 한 채 지평선을 주시하다 아찔, 현기증을 느끼며 문득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되어 있는 듯한 착각을 했을 지도 모른다. 하늘이 땅인 듯, 땅이 하늘인 듯한 느낌은 가물가물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고, 잠깐동안이나마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잃게 만들고 만다.

하지만 그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척이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 속이나 거대한 구름 속을 떠도는 듯 불안정한 시ㆍ공간의 세계는 허리를 접은 채 일에 몰두하던 농민들에 의해 금방 걷히고 말았다. 연신 굵은 땀방울을 훔치며, 맨발로 흙을 일구면서도 어디서 그렇게 흥이 나는지 어깨춤 들썩들썩, 흥얼대는 노랫소리가 삼봉을 깨운 것이다. 삼봉은 비로소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찾고 휴우-, 날숨을 쉰다.

삼봉이 유배길에 오른 것은 고려 우왕 원년인 1375년으로 그의 나이 34살 되던 해이다.

"내가 사신의 목을 베어오거나 아니면 체포하여 명나라에 보내겠다"며 원나라 사신의 영접을 정면 거부한 것이 발단이 돼 친원파 권신들로부터 정치보복을 받은 것이다.

삼봉이 유배를 당한 곳은 나주 평야의 한 가운데였다. 당시의 회진현(會津縣)에 속한 '거평부곡(居平部曲)'의 땅으로 '소재동'이라 불렸으며, 지금의 다시면 운봉리 '백동마을' 부근 나주 정씨 세장산 고랑에 해당하는 곳이다.

삼봉에게 있어 나주 유배생활 3년은 '세상을 다시 보는 눈'을 가진 소중한 시기였다. 그는 순박한 주민들의 따뜻한 대접을 받고 날카로운 세평을 들으면서 참된 민심을 깨달았고, '정치란 결국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민본사상(民本思想)을 키울 수 있었다. 삼봉이 소재동에서 처음 기거한 곳은 황연이라는 농부의 집으로, 동네 사람들이 매일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와 친구처럼 담소하며 보냈다고 한다. '동리 사람들은 순박하고 허영심이 없으며 힘써 농사짓기를 업으로 삼는데 그 중에서 황연은 더욱 그러하였다. …김성길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약간의 글자를 알았고 그의 아우 김천은 이야기하고 웃기를 잘했는데 모두가 술을 잘마셨으며, 형제가 함께 살았다. 또 서안길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삼봉집 소재동기 ' 중)

 

나주 중앙동에 복원된 나주읍성 동문 


삼봉은 지역민과 어우러지면서 농사나 짓는 시골사람들이라고 결코 낮게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느꼈다. 되레 그들이 학자보다 높은 식견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아 배우는 게 많았고, 왜곡된 조세제도와 중앙관료에 대한 불신감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삼봉이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된 것은 어느 날 우연히 만난 한 농부의 꾸지람을 통해서였다.

농부는 "불의를 돌아보지 않고서 한없이 욕심을 채우려다가, 겉으로 겸손한 체하며 헛된 이름을 훔치고, 어두운 밤에는 분주하게 돌아다니면서 애걸하고, 재상이 되어서 제 마음대로 고집을 세우고…악행이 많아 죄에 걸린 것인가"라며 집요하게 따져물었다.

 

백동마을 앞을 지키고 선 노송들.  


삼봉은 이에 대해 "아니오"라는 말만 했을 뿐 명확한 대답을 줄 수 없었다. 그는 당시의 정치와 현실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하는 농부를 통해 바른 나라와 바른 정치를 실현해야겠다는 의지를 갖게 됐다.

'하루는 뒷산에 올라가 사방을 바라보다가 그 서쪽 한 곳이 좀 평평하고 그 아래로 넓은 들이 펼쳐있는 것이 좋아 드디어 종을 시켜 묵은 숲을 베어내고 띳집 두 칸을 지었는데 …동리 사람들이 와서 도와주어서 며칠이 못되어 완성되었다. 현판을 '초사(草舍)라 짓고 거처했다 …내가 이곳을 떠나간 뒤에 이 초사가 비바람을 맞아 무너지고 말것인지 들불에 타거나 썩어 흙덩이가 되고 말것인지 …다만 내가 …세상의 버림을 받아 귀양살이로 멀리 와 있는데도 동리 사람들이 나를 대접하기를 이렇게 두텁게 하니 …'('삼봉집 소재동기' 중)

정남향에 자리잡은 삼봉의 초사는 오늘날 아쉽게도 그의 글처럼 바람에 허물어졌는지, 혹은 불에 탔는지 자취가 없다. 백룡산 자락을 낀 이곳은 인적마저 찾기 힘들어 까칠한 바람소리만 을씨년스럽다.

 

 

아래로 넓은 들을 보고, 사르륵 사르륵 바람에 스치는 댓잎소리 들으며 자신의 정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장고(長考)에 장고를 거듭했을 삼봉-. 이제는 지난 2001년 다시민속보존위원회에서 건립한 '소재동삼봉선생유허비'와 2006년 삼봉정도전선생기념사업회에서 마련한 '삼봉 정도전선생 유적비'만 나란히 자리를 잡아 당시의 모습을 짐작케 할 뿐이다. 삼봉이 살았던 당시 '소재동'의 다섯가구도 없어졌고, 현재는 인근에 백동마을만 남아있다. 소재동에 가는 길목에 위치한 백동마을 앞에는 당시에도 있었을 법한 노송들이 수호신처럼 마을을 지키고 있고, 백동마을과 소재동 중간에는 지난 2005년 도올 김용옥 선생이 쓴 '신소재동기(新消災洞記)'가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다.

삼봉은 고려 충혜왕 복위 3년(1342)에 태어나 19세 때인 공민왕 9년(1360)에 성균시에, 21세 때인 공민왕 11년(1362) 진사시에 합격했다.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제사의식을 관장하는 태상박사에 임명되기도 했으나 우왕 원년(1375) 친원파의 미움을 사 유배생활을 하였고, 창왕 원년(1388)에 위화도 회군에 성공한 이성계가 정권을 잡으면서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다.

삼봉은 나주에서의 3년을 포함, 9년여 동안 유배와 유랑생활을 거치다 우왕 9년(1383)에 당시 함경도에서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로 있던 이성계를 찾아갔다. 이후 삼봉은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으며 '조선왕조의 설계자'로 불리게 된다.

 

 

삼봉은 나주 첫 유배길에서 농민을 통해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았듯, 소재동을 벗어나면서도 민본정치를 잊지 않고자 했다. 이성계와 처음 만난 함경도가 혁명의 불씨를 당긴 장소였다면, 거평부곡 소재동은 혁명의 불씨를 지핀 장소가 될른지도 모른다. 나주시내 중앙동에는 삼봉이 소재동으로 유배를 들어갈 때와 유배가 끝날 때 한 번씩 들러 지역의 부로(父老)들에게 강론을 했다는 나주읍성 동문(동점문)이 지난 2006년 복원돼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삼봉이 첫 방문 때 학자들에게 전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나주를 떠나며 들려준 이야기는 어떤 내용이 담겼을까.

'나 도올이 말한다. 삼봉의 초사는 두자미(杜子美ㆍ두보의 자)의 초당보다 더 길이 청사에 남으리라. 그가 전하는 것은 초사의 이름이 아니요, 조선왕조를 일관한 민본사상이요, 인민의 삶과 정신을 혁신한 토지개혁, 종교개혁 등의 영구혁명론이다. 그 사상이 동학, 의병, 독립운동, 광주민중항쟁을 거쳐 오늘 우리사회의 개혁정신에까지 이르고 있으니 이곳 소재동이야 말로 우리 민족의 끊임없는 혁명의 샘물이다.'(도올 김용옥의 '신소재동기' 중)

 

김만선 기자 mskim@j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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